沃泉 준수 대종회 고문 영면(永眠)하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919회 작성일 13-11-06 16:58

본문

 

沃泉 준수 대종회 고문 영면(永眠)하다

- 11월 2일 새벽 서울 아산병원에서 별세

- 대종회 주관 발인제 진행, 경기도 용인공원묘지 봉안


1028418690_016d09fa_1.jpg

대종회 고문 준수 前 회장께서 지난 11월 2일 아산병원에서 노환(향년 91세)으로 별세했다.

손자와 딸 등 유족들은 이 병원 장례식장 205호실에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대종회에서는 비보를 접하고 의식 총장이 전국 종친회 임원들에게 부고를 띄웠으며, 경진 대종회장을 비롯해 병준ㆍ병재ㆍ재환 부회장과 의식 대종회 사무총장, 부산종친회 병열 사무국장 등 많은 종원들이 당일 오후 조문을 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유족과 협의해 대종회 주관으로 4일 오전 9시 발인제를 올렸으며, 이날 발인에는 대종회 임원 등 종원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을 애도했다. 재환 부회장이 대종회장을 대신해 조사(전문 별첨)를 낭독하자 유족들의 오열 속에 종원들도 슬픔을 함께하며 고인과의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경진 대종회장은 조사에서 “숭조애족 정신이 남다르신 옥천께서는 일찍이 대종회 창립의 산파역을 하셨고, 출범과 동시에 부회장으로 대종보 발간 주선과 시조 설단 조성사업에 솔선해서 시금석이 되셨다”며 “시조사업회의 고문, 담양전씨 장학회 이사장, 제8ㆍ9대 대종회장 등을 역임하시면서 혁혁한 공적을 남기신 우리 종문의 큰 별이었다”고 추도(追悼)했다. 종원들은 우리 종문의 큰 별이 지고 나면 또 다른 큰 별이 솟아오를 것으로 믿으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발인식 후 고인의 유해는 유족들과 조문객들의 애도 속에 리무진으로 모시고 장지로 향했다. 일찍이 고인이 가묘를 군산 옥구에 조성했으나 묘지법에 저촉돼 바로 가지 못하고 일단 경기도 용인공원묘지에 봉안됐다.

1922년 전남 옥구에서 태어난 옥천은 埜隱 27세손으로 7남매 중 장남이다. 군산상업보습학교를 졸업한 옥천은 옥구군 면의원, 민주당 옥구군지구당 창당 상무위원회의장 등 정치활동을 했으나 1962년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정치인의 꿈을 접었다. 서울로 상경한 옥천은 수유리에서 고려목재상사를 설립ㆍ경영했으며, 성남으로 이주해 문화주택조합을 설립해 사업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옥천은 1973년 고려상사(주)를 설립해 회장으로 취임, 성남 현대시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종사에 봉사했다.

지난 2009년 11월 미수를 맞이한 옥천은 ‘옥천해류’를 간행하고 출판기념회를 개최했었다.

                                                          

                                                                                       2013년 11월 5일

                                                                    글ㆍ사진 전병열 종보편집위원


1028418690_93a5a405_2.jpg

1028418690_a35f3f63_3.jpg

1028418690_1aef00a7_4.jpg

1028418690_15dc143f_5.jpg

1028418690_f59043b8_6.jpg

1028418690_e9c4a3f9_7.jpg

 

<哀悼辭 全文>

故 沃泉 俊秀 先生 靈前에 올립니다.


아! 하늘이 큰 재목을 나리셨다가 거두어가는 이치가 없었다면 오늘에 선생을 영결(永訣)하는 아픔이 없었을 텐데...

아무리 무상의 인생이라지만 다시 오지 못하는 길을 떠나셔야 합니까. 무슨 말로 인사를 올려야 한단 말입니까. 이 유명(幽明)의 갈림길에서, 오호통재(嗚呼痛哉) 할 뿐입니다.

옥천 전공께서는 1922년 임술 10월 2일에 군산의 옥구 신풍리에서 담양 전씨 가문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특유의 품성을 지니고 태어나시어 학문의 길로 나갔으나 일제의 강점기와 6.25 전란 등의 불우했던 시절은 공의 큰 뜻을 펼치기에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하시고 정치 분야에 헌신하시다가 뜻한 바 있어 중년에 상경하시고 자녀교육에 전념하시면서 기업을 설립, 성공하셨습니다. 그 연(緣)을 성남에 심으시고 주민들에 베푸신 은혜는 칭송으로 구비(口碑)를 이루니, 이 불멸의 공은 영생의 덕목으로 길이 빛나오리다.

특히 숭조애족(崇祖愛族) 정신이 남다르신 옥천께서는 일찍이 담양전씨 대종회 창립의 산파역을 하셨고, 출범과 동시에 부회장으로, 대종보 발간 주선과 시조 설단조성사업에 적극 솔선하시어 종사 발전에 시금석이 되시고 시조 사업회의 고문으로, 담양전씨 장학회 이사장으로, 제8ㆍ9대 대종회장을 역임하시면서 혁혁(赫赫)한 공적을 남기셨으니 우리 종문의 큰 별이십니다.

부덕한 저 경진이 현 대종회장으로 중책을 지고 대동보 완성 등 큰일을 도모함에 있어 힘을 주시고 지도를 받아야 할 시점인데 이렇게 홀홀히 떠나신단 말입니까.

종친장(宗親葬)으로 모셔도 부족하온데 이 박주 일배(一杯)로 고별(告別)드림을 용서하소서. 잊지 않으리라 님의 큰 업적을, 잊을 수 없습니다 베풀어 주셨기에 소아(素芽) 시인(詩人)이 옥천선생께 드린 송시 중에 “옥천은 무궁하리. 님은 문중의 영광, 우리 가슴에 넘치는 신앙이네.” 이 시가 더욱 절실합니다. 온

지난 2009년 선생의 미수연 및 ‘옥천해류’ 출판 기념회 일에 참석하신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옥천께서는 인사말씀에서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뵙는 것이 마지막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참 값진 만남"이라 하시며 반겨주셨던 덕담이 생생하온데, 꼭 4년이 지난 오늘은 음력 10월 2일로 선생의 91주년 생신이시니 출천(出天)의 운명 또한 범상(凡常)치 않음을 실감케 합니다.

옥천 족장(族丈)님! 육신은 비록 불귀의 길을 떠나시지만 남기신 업적은 정령(精靈) 다 함께 영원하오니 이생에서 못다 하신 한(限) 저생에 펼치시고 영생(永生)의 먼먼 길 부디 평안하옵소서.

높은 유지를 받들어 종신발전에 혼신(渾身)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모든 종원들은 애도의 마음으로 유족께 위로 드리며, 옥천 영령(英靈)의 명복을 빌고 또 비옵니다.


                                                         2013년 11월 4일(음 10월 2일)

                                                  담양전씨 대종회장 田 慶 鎭 재배 哭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