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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적 근대’ 찾는 학자들에게
재발견돼 왜곡된 담헌의 모습
실은 철저한 ‘유가 근본주의자’
북경 연행 후 한족 학자들 교류
화이사상에 균열 갖게 되지만
혁명성·백성에 공감과는 거리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우리역사넷’은 조선 영·정조 시기를 살았던 담헌 홍대용(1731~1783)에 대해 ‘수학과 과학에 밝았던 천재 실학자’라고 설명한다. 당대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지전설(지구자전설)을 주장한 독창적 과학자이자 중국 우월 바다이야기 주의인 화이론(華夷論·중국은 문명국이고 다른 나라는 열등한 오랑캐라는 주장)을 부정하고 신분차별에 반대한 개혁적 사상가였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이는 홍대용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다.
<홍대용 평전 1·2>를 쓴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명예교수는 ‘책머리’에서 홍대용에 대한 이 같은 주류적 해석을 되풀이할 생각이 없음을 밝힌다. “미리 말하자 체리마스터모바일 면, 나는 실학자, 북학파, 개혁적 사회사상가, 지전설과 우주무한설을 주장한 과학자 담헌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도합 1300쪽이 넘는 이번 평전을 통해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일은 홍대용에 대한 기존의 상찬을 되풀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뒤집어 폄하하는 것도 아닌, 홍대용을 둘러싼 신화를 해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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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은 1766년 청나라 수도 북경에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 항주에서 온 학자들을 만나 형제의 의를 맺었다. 사진은 엄성이 그린 홍대용의 초상. 푸른역사 제공
‘홍대용 탈신화화’ 작업을 위해 저자는 홍대용의 개인사를 모바일릴게임 철저하게 파고든다. 홍대용의 생애를 살피고, 그의 저술은 물론이고 그 배경이 되는 당시 청과 조선의 문헌들, 중국 지식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 그가 남긴 모든 텍스트를 살핀다. 홍대용의 관심사가 경학, 역사, 천문학, 수학, 자연학, 음악학 등 다양하게 뻗어 있었으므로, 저자가 평전을 쓰기 위해 섭렵한 텍스트들의 스펙트럼 또한 방대하다.
야마토게임 현재의 충남 천안시에 해당하는 충청도 청주목 수신면 장명리에서 홍역의 유일한 적자로 태어났다. 홍대용의 집안은 조선 후기 지배세력이던 노론에 속했으며, 경화세족(京華世族) 가문이었다. 경화세족이란 서울에 거주하며 중앙관료가 될 수 있었던 지방 양반을 가리킨다. 아버지 홍역은 말단 관리였으나 숙부 홍억은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판윤, 형조·예조 판서 등을 거친 고급관료였다. 쟁쟁한 경화세족 가문 일원들은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관직을 차지했는데, 홍대용 자신과 아버지 홍역이 모두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지방관리를 지냈다. 경제적으로도 대지주였다. 당쟁에서 승리한 세력에 속해 있었고 경제적 어려움도 없었다는 것은 홍대용이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됐다.
홍대용은 1762년 천문시계 혼천의를 제작했으나,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국립중앙과학관은 2022년 문헌을 근거로 홍대용의 혼천의(왼쪽)를 복원해 전시했다. 국립중앙과학관 제공
젊은 시절 홍대용은 재야 학자 김원행의 영향을 받아 과거를 통한 출세를 경시하고 정주학(성리학)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중시했다. 실천을 통해 윤리적으로 완성된 인간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경전을 외우기만 하거나 시·산문을 짓는 행위는 일탈이라고 여겼다. 홍대용은 성리학의 윤리에 어긋난 것이라면 스승이나 자신이 속한 당파의 영수(송시열)는 물론이고 성현의 텍스트까지도 비판한, 철저한 ‘유가 근본주의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홍대용을 ‘실천적 정주학자’라고 명명한다.
홍대용 생애에서 두 가지 중요한 전환점은 1759년 전남 나주의 자명종 제작자 나경적(1690~1762)을 만난 것과 1765년 말~1766년 초의 연행(조선 사절단의 북경 방문)에 동행한 일이다. 홍대용은 나경적과의 만남을 통해 서양 천문학과 접하고 거액을 들여 천문시계 혼천의를 제작하게 된다. 연행을 통해서는 평생의 친구들을 얻었을 뿐 아니라 중화중심주의를 버리는 사상적 전환의 계기를 얻는다. 오랑캐라고 깔보았던 청의 놀라운 물질적 번영을 목도하고 받은 충격과 깊은 내공의 성리학자이면서도 청의 통치를 부정하지 않는 한족 학자 엄성, 반정균, 육비와의 교류에서 받은 인간적 감화는 화이사상이라는 단단한 껍질에 균열을 일으킨다. 홍대용과 중국인 벗들의 만남, 이들이 북경에서 주고받은 필담, 홍대용이 조선으로 돌아온 뒤 이어진 서신 교류 등을 다룬 대목은 18세기 동아시아라는 특수한 시공간에서 가능했던 빛나는 우정의 순간이다.
평전의 백미는 저자가 홍대용의 천문학 저술 <주해수용>과 말년 저술 <의산문답>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부분이다. 이 저술들에서 홍대용이 제시한 지전설과 지원설(지구가 둥글다는 주장), 화이론 부정, 신분차별에 대한 비판 등은 ‘담헌 신화’의 핵심이다. 오늘날 홍대용에 대한 주류적·통념적 평가는 그가 미신적 사고와 신분제의 질곡이라는 중세적 질서를 깨뜨리고 중국에 맞서 민족주체성을 강조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20세기에 재발견된 홍대용의 사상이, 그에게서 조선 사회의 ‘자생적 근대’의 근거를 찾으려는 이들에 의해 왜곡됐다고 본다.
연행을 통해 중국 밖 세계인의 존재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서양 천문학과 수학을 접한 홍대용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익힌 천문 이론에 따르면 지구 자체가 우주 공간 속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저자는 그러나 홍대용의 지전설은 지구의 공전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동설과 다르고, 지동설이 서구의 중세 신학에 도전한 것과 같은 사상적 혁명성을 내장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또한 홍대용이 화이론을 부정한 것은 선배 김종후가 자신의 중국인 벗들을 청에 굴복한 변절자라고 비난한 데 대한 변호 논리였을 뿐으로, 여기서 ‘민족의 주체성’을 끌어내는 것은 억지 논리라고 지적한다.
홍대용이 사족을 비판한 발언이 신분제 타파로 해석되고 있으나 이 또한 홍대용 자신이 사족이었음을 생각하면 모순적이다. <반계수록> 등을 통해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출한 유형원(1622~1673)과는 달리, 유력 가문·대지주 출신인 홍대용에게는 백성에 대한 고민이나 공감이 없었다. 영천군수를 지내면서 진휼곡 500석을 착복한 뒤 군민에게 빌려주고 곱절의 이자를 매기는 등 부패 전력에서 자유롭지도 않았다.
저자는 위당 정인보가 1939년 <담헌서>의 서문에서 홍대용을 실학자들의 계보와 무리하게 엮은 것이 ‘홍대용 신화’의 시발점이라고 짚는다. “그로써 담헌은 사실이 아닌 신화가 되었다. 신화이기에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오랫동안 전승될 것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기자 admin@slotmega.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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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은 1762년 천문시계 혼천의를 제작했으나,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국립중앙과학관은 2022년 문헌을 근거로 홍대용의 혼천의(왼쪽)를 복원해 전시했다. 국립중앙과학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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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기자 admin@slotmega.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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