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선씨들 담양전씨 외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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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담양전씨 외손
댓글 0건 조회 347,959회 작성일 08-01-08 17:41

본문

보성선씨 (중)시조님은 선용신(宣用臣)
            배위는  담양전씨

  따라서  선씨들은 담양전씨 외손들입니다
  선씨들에 대한 자료 올리니 궁금하신분들은 보세요
  그리고 타문중이자 외손들인 선씨에 대하여도 hp에 올려 놓으세요  "외손들의 성씨" 뭐 이런거
 
  선용신님은 고려 고종조에 나시고 원종조에 병부상서하시고
  패주군(貝州君)에 봉해젔습니다. 그래서 관이 보성(=패주)이죠
  2대는 儒(규정. 안찰사)와 佐(보사)이며  3대는 元祉(예의판서).
  允祉(전라안렴사)입니다. 3대째부터 파가 갈렸어요.

1. 보성선씨의 유래

  선(宣)씨의 유래 
                                                             
  보성 선씨  시조님 휘  用臣

    ㅇ선씨 본관이 전남 보성이며 단일본이다.

    중국인 노대부 선백 의 후손들이며 중국에서는 漢(BC202-AD8)의 선여학.明의 선천주,

    우리나라에서는 백제(BC37-AD668 ) 이전부터 현재의 우리에 이르기까지

    역사가 오래고 줄기가 많다.

 

  ㅇ漢書에  漢고조(유방) 2년에  宣虎, 宣義 두분을 千戶侯에  封하였다는 내용과  漢말에 선씨들이

    海東으로 많이 피난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싯점이 우리나라로의  이주시기가 아닌가 분석하고있다.

      언제인지 8학사. 7대신이 우리나라에 파견될때 선씨 한분이 포함 되었었다는 流傳된 설도 있다. 

      (이상은 안렴공 후손인 선 응뢰님이 漢書의 기록 직접 확인하고  당시 양파 합의로 완성된 1681년

      신유년 족보 초안 서문에 올렸든 내용.일찍 돌아가신통에 한서의 내용을 인출 못하심)

 

  ㅇ 따라서 우리나라의 선씨들은

        백제이전부터

      伏虎村(伏忽=보성=山陽=貝州)등에서

      지금까지 2000년을 살고있다.

     

      보성으로 관을 세우기전 시조 선용신의

      조상들과 일족들은  보성에서 살았고.

      貫은 선용신이 고려 원종때 조정으로부터

      패주의 君에 임명되면서 받게된다.

 

        우리나라  선씨는 백제 이전부터 이땅에

    살았으니토착 성씨나 다름이 없다.

    고려말에 귀화한 성씨라는

    자료가 있는데 앞의 기록들과 괴리한다.

    그런데 왜 始祖가 고려 고종조의 선용신

    일까? 

    그건 안타깝게도 선용신 이전의 代를 알 수있는

    기록이 없어서 공적인 기록상 가장 先代인 그를

    중시조로 모신것이다.

    참의공(宣仲義)의 호적이 선씨들의 유일한 공식 문서

    인데 이호적 정점에 "進士 선용신"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외의 다른 기록들은 보전되지 못했다.

    물론 족보. 가승이 없었던건 아니나 임진난등 많은

    전란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천만 다행히 참의공의

    호적이 남아있었는데  이 호적은 1421년(세종3년)에

    호조에서 공인한 국가 공식 서류이다.

    이 고서(호구첩)는 이미 학계의 검증을 마치고 국가

    보물로 지정 신청중이다.

    1681년 양파가  족보 시안을 만들 당시까지만해도

    모든 선씨들이 이 호구첩에 의한  宣用臣- 儒. 佐

    2대를 선조로 모셨었다.(兩派라함은 모든 보성선씨

    들이 현실적으로  2개의 파에  속하는데  선용신을

    시조로하는 예의판서공 원지 후손과 전라안렴사공의

    후손을 지칭하며  전자를 도촌. 후자를 갈몰이라함)

       

    선씨들은 오랜동안 현재의 보성읍에서 거주하다

    조선조 조정에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선씨들 집터(世基)에 官舍를 신축하게되어

    동노군 적촌면(도촌)과  보성 봉산리등으로

    이주하여 살게된다.

 

  ㅇ그러면 중시조인 선용신은 어떤분인가?

    그는고려 고종조(1213-1259)에 보성에서 태어났다.

    문장(학문)으로 이름을 떨첬고 문과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원종(1259-1274)때부터 벼슬길에 올랐다.

    관합문의 지후. 문하 시랑. 참지정사까지 빠르게

    승차한다. 당시 무신정권의 독주와 그로인한 피폐가

    매우 심하였는데    그는

    우두머리(최고위 실세)인 임유무와 그 무리들을

    제거하는 거사에 참여하여 조정을 도운다.

    그 공으로 좌명공신이 되고 병부상서를 배수하였다.

    또  여진 정벌에 참여하여  원종으로 부터

    貝州君(보성군의 수장)에 임명되고 보성을 관(貫)으로

    받게된다(선씨들의 자의적 선택이 아닌).

                *이상 려사제강에 근거

      구전에 의하면  사병을 수백기 거느린 기골이 장대한

      장수타입의 文臣이였으며 가끔 보성에 내려와 병졸

      훈련시는 봉화산과 백이산 일대부터 득량만에 이르기

      까지 말발꿉소리가 진동하고 먼지가 해를가렸다한다.

      그가 나타나는곳이면 항상 큰 솥이 걸리고

      여러섬의 죽을쒀  허기진 향리 사람들을 규휼하였기

      "한솥장군"(=大鼎將軍)이라는 별명이 전해온다.

 

      그는 아들을 둘 두었는데 장자는 儒이며  승봉랑.

      규정.삼사좌윤.안찰사를 지냈고 차자는 佐(良佐)인데 

      수찬이였다.

      규정공 儒는 두아들을 두었는바 장자는 보승랑장.

      대제학.예의판서를 지낸 元祉로써 당대의 석학 우탁 

      (제조)과 교류하였으며 차자는 允祉인데 전라안렴사

      로써 남부해안에 자주침범한 왜구를 깨끗이 소탕한

      큰공이 있으며 말년에는 유학진흥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수찬 佐의 아들은 起祉이고 부사를지냈으며

      딸은 함안趙 덕곡에게 출가하였다(함안 趙氏대종회

      에서 선씨들의 족보 내용과 한자도 틀림없이 기록

      되어 있으며 선씨 할머니의 묘소도 잘 관리하고 있음

      을 통보해왔고 양파에서 현지 묘소를 답사한 결과

      비문도 선명히 보성선씨로 확인되었다. 즉 보성선씨

      선용신의 계보에 대한 타성씨 문중 족보와의 교차

      확인이며 선씨가 어느 시점에서  갑짜기 나타난

      성씨가 아님을 받아들여야하는 역사의 진정성이다).

      원지의 아들은 절도사 중길. 호조참의 중의 둘인데

      이중 참의공이  가문에서 고려때부터 보관해오던

      호적이 전란으로 없어지자 세종때  재발급받아

      후손들에게 남긴 장본인이다.

     

    ㅇ보성선씨 족보에 혼선이 생긴 경위는 이렇다.

      1681년에 양파(당시는 예의판서공 원지파. 전라

      안렴사공의 윤지파)는 관산의 보림사에서

      모든 선씨들이 가지고있는 단편적인 자료

      들을 수집 검증하여 계보를 확립하고  참의공

      (선중의)의 호적에 따라 선용신을 시조로하여

      대동보 초안을 완벽하게 합의 작성한후

      1688년 보성 개흥사에서 다시 수정 하였는데

      이듬해 안렴공파  몇분(선필하. 선수구)들이 1689년

      갑짜기 선용신 2대를 의조(疑祖: 의심가는 선대)라고

      주장하면서 합의된 대동보 초안을 무시한다는 일방

      통보후 시조 2대(용신-유.좌)와  3대 원지 계열를

      빼버린체 단독으로 족보를 만들었는데 선씨들에게

      는  뼈아픈  갈라섬의 시발이 되고말았다.

      그후 1697년 예의판서공 후손들도 종맥의 찢어짐과

      혼선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불가피  안렴공의 후손을

      제외한 족보를  만들게 되었다(파보의 실제 원인은

      도촌파의 수효가 적고 융성하지 못한데 기인한것으

      로 선대들이 분석하였음).

 

  ㅇ보성선씨는 많은 충신 효자 효부,정치가,학자가 나와

      전남은 물론 전국적인 명문 대성씨로 자리 메김하였

    고 지금 양대파의 후손들은 각분야에서 현조들

    의 치적에 걸맞는 처세에 노력하고있다.

 

      사는곳(집성촌 포함)은

      보성일대, 순천, 장흥, 광주, 전주, 경기 광주,이천

      강릉, 김해 등 전국에 고루 퍼져있다.

      몇개의 본이있다고하나 모두 사는곳 중심의 派의

      개념이며 근본(根本)은  모두 보성선씨이다.

 

  ㅇ특별히  예의판서공 후손으로  병마절도사 여경과

    필백.경백.청원.해수.인수의 壬亂六忠과 호란(胡亂)의

    문환.영길 二功의 절의(節義)는 가문의 빛이며

 

      안렴공과 그후손 유성군 형.임난 1등공신 친친제 거이

    장군.안동령장 세강.수사 약해는 五忠으로 오충사에서

    제향하고 있으며 가문의 자랑이다.

     

      인구는 35,000 명 정도되는데

      안렴공 후손들이 훨씬 많다.

 

2.보성선씨 호구첩(호적등본)
                                                             
                                                 
  먼저 알아두어야할 내용은
      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호적등본중에 이성계 호구첩 다음
으로 오래된
            진본입니다(세종 3년, 1421년 호조 공인)
            학계의 검증을 거처 현재 한국학중안연구원에서 보관
하면서
            국가 보물로 지정하기위한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나. 고려와 이조시대는  호구 관리가 국가적 중요 사업임
을 알 수있습니다.
      다. 그 짜임새와 내용이 사료적 가치가 가장 높은것으로 평
가받고있습니다.
      라. 고려말 부터 써오든 한자. 말. 표현기법으로  당시의
일선 행정기관의
          문서 작성법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마. 모계 혈통을 중요시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있습니
다.
      바. 선씨들의 중시조 진사 선용신(고려 고종시 출생. 원종
때 병부상서.
            貝州君)의 고려 및 이조 조정의 신원증명입니다.
 
ㅇ. 宣氏 戶口帖(호적등본) 진본 사진
    생략
 
ㅇ. 위 호구첩(호적등본)의 가로쓰기                   
 
全羅道知寶城郡事爲戶口事 今七月二十五日本郡接通政大夫檢校戶曹
參議 宣仲義所志內 持音戶口乙 倭亂서失後 更良成置不得爲
白有臥乎 節夫妻同籍子息等乙用良所志後錄爲白去乎 兩邊祖上作文相
考陳省成給向事 所志是去有良이
本戶口進來相考爲白乎矣 加減無白置有良이 合行具呈 伏乞 照驗施
行 須至呈者
 
右呈
 
 戶曹
 
永樂十九年 七月二十五日 知郡事金  00
 
戶口         
                         
呈後
 
戶 通政大夫 檢校戶曹參議 宣仲義  年六十四 本 寶城郡
      父 左右衛保勝郞將 元祉 故
      祖 承奉郞監察糾正 宣儒 
      曾祖 進士 用臣 
      外祖及第神虎衛保勝別將朴 逸本寶城
     
戶  祖妻矣父 從仕郞司設署丞 朴益莊 本  寧海府
      祖 及第 引成
      曾祖  郞將同正  林茂
      外祖  檢校軍器監  宋安    本 玉果
     
戶  外祖妻矣父 監門衛郞將 李碩  本  00 
        祖 中顯大夫監門衛大護軍 李公
        曾祖  追封正順大夫鷹楊軍上護軍 李仁
        外祖 通禮門祗後 崔經, 本 溟洲
 
戶 妻全氏故本中牟縣
      父 興威衛保勝別將 龍守
      祖 承奉郞通禮門祗侯 解官 全  00
      曾祖 中顯大夫檢校大護軍 良節
      外祖 令同正 金良  本泗州
 
戶 祖妻父 禮賓丞同正  全挺  本 中牟
      祖 注簿同正 全義
      曾祖 令同正 孝順
      外祖 令同正 姜公載  本 同村(材?)
 
戶 外祖妻父 令同正 李之桂  本晋州
      祖 中軍錄事神虎衛保勝中郞將 李  00 
      曾祖 閣門通事舍人 李文
      外祖 興威衛精勇攝中郞將 高應海  本開城府
 
幷産 一男 同미 年三十六 二男 興道年二十九
 三男 宗道 年二十七  四男  弘道 年二十四
 五男 庸道 年二十一  一女子 年十
 
        節付  印
                   
                    原
 .............................................................
.................................................           
     
 
ㅇ,판독(한국학연구소 안승준 박사)
 
전라도 보성군사가 호구를 시행하는 일이다. 금년 7월 25일 본 군
에 거주하는 통정대부 검교 호조참의 선중의가 올린 소지 내에,
“가지고 있던 戶口(호적)을 왜란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뒤에 다시
만들어두지 못하였으므로, 지금 夫妻가 함께 기록한 호적과 자식들
을 가지고 소지 뒤에 기록하오니, 부처 양변의 조상의 문서(作文)
를 상고하셔서 陳省을 만들어 주실일” 이라는 소지입니다. 본 호
구를 보성군에 제출하게 하여 상고해보니, 加減이 없습니다. 마땅
히 시행하도록 갖추어 올립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잘 살피셔서
시행하십시오.
 
  우정
  호조
  세종19년(1421년) 7월 25일.  지군사 김00
  호구
  정후
 
  호  선중의      본인과 직계
      선중의      조모
      선중의      외조모
      선중의의  처
      선중의의  처 조모
      선중의의  처 외조모 
          의  본인.부.조.증조.외조 등 40명이 기록됨(생략)
   
        官印 6處 : 여섯부위에  낙관이 있음
        印文내용 :  전라도도관찰출척사(全羅道都觀察黜陟使)
 
      *위 호구첩에 쓰인 한자들 중에는 이두(소리로 빌려씀)로
        쓰인 글자가 많음.
 
  *. 호구첩에 대한 쎄미나
 
    일자: 2007년05월12일
    장소: 한국학 중앙연구원
    강사: 문학박사 안승준
 
 
      ○  戶曹參議 宣仲義
        -출생지: 전남 보성군 득량면 정흥리 호음동
  -1358년 고려 공민왕 7년 출생.
  -1392년 조선조 개창과 더불어 관직에 나가 통정대부
            검교호조참의를 지냄.
  -1421년(세종 3년) 山陽(보성)으로 낙향.
  -1423년 사망.
 
가. 현재까지 발굴된 호적(호구) 가운데 국보 131호
    1392년 이성계 호적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원본 호적. 작성 시기. 사료적 가치 등의
    측면에서 볼 때 국가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됨.
 
나. 호적에서 최소한의 세계를 밝히는 것은 신분제도의 성립과 함
께 입적한
    자의 국가에 대한 의무와 관련하여 그 사회적 신분을 확인하
기 위해서
    발전되었다. 그러나 고려호적이 그에 그치지 않고 광범위하게
그 세계를
    밝히고 있는 것은 호적이 단순히 국가에 대한 의무와 관련하
여 호와 구를
    파악한다는 기능외에 고려에서의 신분제도 및 친족제도의 발전
과 관련
    하여 봉건적인 신분과 친족관계를 그 자체로 확인하기 위한 기
능을 따로
    가지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다. 고려(高麗)의 호적 제도는 팔조 호구에서 그 모계(母系) 및 처
계(妻系)의
    세계를 부계(父系)의 그것과 같이 광범하게 밝히는 제도와 함
께 고려시대 
    의 여성 지위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3.宣씨,보성선씨 (중)시조 선용신
 
宣氏는 전남 보성이 貫이며 단일본이다.
원래 중국인 魯大夫 宣伯의 후손들이며
우리나라로의 이주 시기는 확실치 않다.
고려 원종조에 무신정권 실력자 임유무와
그무리를 제거하고 또 여진을 정벌하는데
큰공을 세운 선씨의 (중)시조 宣用臣은
족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 
   
(本文)
 宣 用臣  配 潭陽 田氏(선용신 배 담양전씨)
 
    宣 之 先本 中國人 魯大夫 宣伯 之 後
    (선지 선본 중국인 노대부 선백 지 후)
 
    東萊 事跡 不可考(동래 사적 불가 고)
 
    公 生 高麗 高宗朝(공 생 고려 고종조)
 
    文章名世 以進士 登文科 仕事 元宗
    (문장 명세 이진사 등문과 사사 원종)
 
    官閤門祉侯  門下侍郞  參知政事
    (관합문지후 문하시랑 참지정사)
 
    掃平 賊臣 林惟茂黨 (소평 적신 임유무당)
 
    錄 佐命功臣  拜 兵部尙書(록 좌명공신 배 병부상서)
    又  征 女眞  有功(우 정 여진 유공)
 
    封 貝州 君  仍 受貫(봉 패주 군  잉 수관 )
    焉      事載 麗史提綱(언    사재 려사제강)
 
 
 (譯)
선 용신:  부인 담양전씨
 선씨는 원래 중국 노나라(삼국시대쯤- 공자가 태어난 나라)
 대부(왕족보다 낮고 벼슬 중 고위급  고려의 정2품에서 4품 정도)
 선백의 후손들이다. 우리나라 이주 사실은 확실히 알 수없다.
 공은 고려 고종조(1213_1259)에 태어나다.
 높은 학문과 고매한  인품으로 세인의 존경을 받았고
 진사로써-문과 합격하여  원종(1259_1274)때  벼슬하다.
 벼슬의 품계는  관합문(국가의 행사. 의전 담당 관청)의 지후
 (정9 종9 18품계중  정7품).  문하시랑(문하부 소속의 정4품).
 참지정사(중서 문하성의 종2품)까지 순차 역임하다.
 특별히  무반의 수장으로 국기를 문란시킨 임유무와 그무리를
 제거하여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데  앞장섰기 조정으로부터
 좌명공신으로 책록되고 병부상서(국방장관)가 되다.
 또 변방을 어지럽힌 여진족을 토벌한 공으로
 패주(전남 보성의 옛이름)의  수장으로 봉해지고
 이로인해  보성을 선씨들의 관으로 받다.
      이런사실들이  려사제강에 올라있음이여.
         
      (후손)
        子_    2대:      儒 (삼사 좌윤. 안찰사)
                            佐 (수찬)
        孫_    3대:      元祉 (예의판서)
                            允祉 (전라안렴사)
                            起祉 (부사)
                            趙承肅 (함안조  덕곡)
                              *안렴사. 안찰사. 절도사는  같은
지방관 직
                                     
  위 내용을 살펴보면                         
        본문에서 "公生 고려 고종조"중  生은 태어남을 뜻한다.
        따라서 그이전 부터 先代와  일족들이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보성선씨의 시작을  14세기 중후반(1382년 우왕시)으로
        소개한 자료가있으나 이해할 수 없다.
        13세기 초중반(고려 고종조)에  선용신이 태어나
        고려국의 국방고위급으로  활동했던 기록과
        현재 까지 보존되어온 역사적 기록들에 의하여
        1200년대 초중반(고종조)이 선씨의 족보(기록)상
        시발점임이 증거된다.
     
        선씨들은 백제 이전부터 복호군(=복홀= 보성=산양=패주)
        에 살고있었다. 보성으로 貫을 세운 시점 이전  이미
        천여년을  살고 있었으나  이주 정착 시기는 알 수 없다.
        현재의 보성군 여러 마을에 선씨들이 고려 이전부터
        살았음도 나타나고있다.
        따라서 고려말에 귀화한 성씨가 아니며  삼국시대부터
        토착화된 성씨다(어떤 특정 인사가 선씨로 귀화하여
        별도의 가계를 이루었다는 가설은 있을 수 있다).
 
        노대부의 후손임에는 이의 없다.
        漢書에  한고조가 선씨 두분(선호. 선의)을 千戶侯에
        임명하였다는 내용과  한말에 해동으로  대거 피난하였
        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한말에 이주해왔을것
        으로 분석하고있다.
        流傳된 말로는 언제인가  8학사. 7대신 파견시
        일원이었다는 설도있다(이상은 1681년 선씨 양파가
        합의하여 완성하였든 족보 초안에  전라안렴사 후손
        선응뢰님이 서문에 명시).
 
      선용신에 대한 호적의 기록은 1421년(세종3년)에
      호조에서 생성한 "호구첩(호적등본)"에
      宣仲義(1358-1423)의  증조부며 進士로 등록되어있고
      그 호구첩은  현재 한국학 중앙연구소에서
      국가 보물로 지정신청하기 위해 보존하고있다.
      *위 戶口帖은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든 호구첩을
        병란으로 유실하었기 선중의가  제 증빙서류 붙여
        實査받은후  재등록 공인받은것임.
        1세대를 30년으로 어림잡아도
        선중의의 父 선원지는 1328년, 祖 선유는 1298년
        曾祖인 선용신은 1268년 이전의 인물이다.         
 
      선용신의 손녀가 함안조씨 집안(덕곡  조승숙선생)으로
      시집가고 거기서 孫을 본 기록이 선씨들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데 함안조씨 대종회에서  선씨 족보에  기록된
      덕곡선생의 장인 宣良佐와  세아들 이름까지  趙씨들
      족보에도  똑같이 기록되어있음과  "보성선씨 할머님"의
      묘소도 관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타 문중과의 cross checking)
 
      따라서 선용신의 家系는 공적 기록을 확보하고있고
      우리나라에서의 선씨 역사가 매우 오래임을 반증한다. 
         
      선용신은  가문을 단시일 내에 일으켜세웠고 그 家勢 또한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무신들을 제압할려면  정보와 군사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였는데  그러한 능력이 없는 사람은  거사 주류

      합류하기 어려웠을 것으로봐서  私兵까지도 보유했음이
      확실하다.  특히 임금(원종)으로부터의 묵시적 동의나
      요청이 없었다면  불가한 일이여서 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든 인품과  그릇 크기를 짐작케한다. 선씨들이
      보성을 관으로 정함도 선씨들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조정에서 지방 제후(君)로 임명하면서 부수적으로
      받게(受貫)되었으며  이러한 튼튼한 기초가  지금까지 
      단일본을  유지하게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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